잭이 지은 집, The House That Jack Built

 

어떤 영화에 대해서는 잘못 말해지기도 한다. 말해야 할 누군가가 언급하기를 꺼려해서 이기도 하고 부족한 이해에서 성급하게 말해지기 때문이다. 말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주제에 관해서 논쟁 중이거나 숙고하는 과정 중이어서 결론이 아직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잘 못 말해지는 이유는, 그 주제에 관해서 특별히 관심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제 막 그 논쟁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전혀 엉뚱한 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못 말해진 것들만이 그 영화를 이해하는 설명이 되기도 한다. 영화 “살인마 잭의 집”이 이런 경우다.

 

감독은 살인마 잭의 집이라는 영화 제목으로 말해지는 것을 싫어할 테지만, 이 글에서도 영화의 제목을 살인마 잭의 집으로 할 것이다. 살인마 잭의 집을 미술사로 말하자면, 예술이라면 모름지기 지성적인 표현이어야 한다는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하고 대중에게 재미를 선사해야 예술이라 주장하며 추상표현주의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팝아트와 설치미술로의 전환기의 미술사적 시간대를 거꾸로 돌려 시각화한 영화다. 영화에서 멀리 떨어져 바라본 시선으로 말해지는 것 같아서 조금 더 가깝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스토리로 보자면, 폭력이 영화로 다뤄질 때는 피해자들의 불행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희망이 조금 섞인 결말을 보여준다. 수많은 범죄영화들이 그렇듯이 악은 언젠가 인류가 극복할 무엇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살인마 잭의 집은 희망을 인류의 손에 맡기지 않을뿐더러 선함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자멸하는 것으로 끝난다. 인류의 선한 의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결론의 영화는 기분 나쁜 여운을 안기기에 관객의 외면을 받을 것이 너무나도 뻔해서 흔하게 제작되는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작정하고 본다 하더라도 영상에서 시선을 돌리게 되는 영화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것은 감독의 의도다. 의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영화는 권하고 싶지 않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영상으로 보자면, 영화는 잔혹한 살해 과정과 죽어서도 살인자에게 끔찍하게 학대당하는 피해자의 시신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교양 살인마”라는 고상한 별칭을 살인마 잭이 갖게 한다. 다시 한번 영화상의 피해자를 능멸하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좋은 영화의 일반적인 기준은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는 영화지만, 그것에서 아주 멀리 벗어난 영화다. 앞서의 긴 말을 줄여 말하자면, 그럼에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고 “이 영화를 보지 말기를 바란다”가 이 영화에 대한 간결한 답변일 듯싶다.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영화들은, CG와 같은 기술적인 재현의 완성도와 스토리의 허구나 사실에 관해서 주위 사람들과 공감하거나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화를 하게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느 누구와도 대화할 점이 없다. 이 점이 이 영화를 촬영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의도인 것은 분명하다. 살인마 잭의 집은 대중에게 일반적으로 말해지는 것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겨움과 불쾌함을 견뎌내고 보게 되는 특정한 개인에게 보이려는 영화다. 영화를 본 사람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하다가 미래에 말해지는 어떤 방식을 찾아내어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해지기를 바라는 영화다. 그것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아주 먼 미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글은 영화를 본 바로 직후에 말해지는 것이기는 하다. 그래서 이 글도 성급하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는 법

 

인간은 보기에 익숙해 있는 것만을 보며, 자기의 상습적인 생각들의 메아리에만 귀 기울이고, 그것만이 들리는 것이다. – 르네 위그

이 영화는 영상과 텍스트를 시간이 흐르는 대로 같이 볼 수 없는 영화다. 영상과 텍스트를 분리하고 각 영상의 시간대도 조정해야 한다. 아주 가까이서 그림의 일부분을 보다 다시 멀리 떨어져서 전체로 봐야 이해되는 큰 그림 같은 영화다. 그래서 영화를 몇 번 더 봐야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영상/텍스트, 에서 텍스트를 떼어 내어 영화에 등장하는 예술작품에 대입해 예술작품/텍스트, 로 보면 예술비평 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작품/텍스트, 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영상/텍스트, 가 필요하다. 감독은 텍스트를 영상에 집어넣어서 영상과 텍스트를 분리하려는 시도를 방해한다. 눈을 감고 텍스트만 걸러내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가독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들을 아주 긴밀하게 엮어 놓은 것이다. 보기 싫어도 봐야 하는 이 영화는 영상/텍스트/예술작품, 이라는 집합체인 영화를 쉽게 분리할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다 봐야 한다.

 

일반적인 폭력영화가 영화 내적인 폭력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영화는 정신적인 폭력을 영화 밖의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이보다 더 폭력적인 영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다른 대안을 감독은 제시하고 있다. 잭이 살인마가 아니라 예술가라고 인정하는 데서부터다. 영화 속에서 잭은 살인이 아니라 예술 작품을 제작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폭력은 우리 뇌리에 강력한 메시지 전달 수단일 뿐 그 행위의 결과는 예술로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 그럼 그래 보자. 더군다나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감독이 단지 B급 삼류 폭력영화를 만들려 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잭(감독)의 말을 믿어 보자.

 

작업실, 팩토리와 냉동창고

 

잭의 작업실은 세 곳이다. 실제 거주하는 곳과 작품을 보관하는 냉동창고, 그리고 작품의 재료가 되는 피해자의 집이다. 실제 거주하는 집은 앤디 워홀의 팩토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작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으며 냉동창고는 재료의 저장고이자 고유의 작품성이 담긴 것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피해자의 집은 작품의 재료를 구하는 곳이자 실제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렇게 세 곳의 작업실에서 잭의 작업이자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줄 작품을 완성해 간다.

 

세 곳으로 분류하기는 했지만 앤디 워홀의 작업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왔다. 영화적 세계가 팩토리를 옮겨 왔다고 볼 수 있다. 잭의 실제 거주지는 건축가라는 생업을 위한 영화적 공간이면서 앤디 워홀이 돈을 벌기 위해 팩토리에서 처럼 대량으로 복제된 상업예술작품들이 제작되고 있다. 재료가 되는 피해자의 집은 앤디 워홀만의 공간에서 순수미술작품을 제작 공간과 같다. 냉동창고에서는 추상표현주의 혹은 순수미술작품이 보관되거나 제작되고 있다. 앤디 워홀이 상업예술가에서 순수 미술가가 되려던 것처럼 잭도 앤디 워홀의 길을 따른다. 이것이 영화의 내용이며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이제 잭의 작업실에서 작품을 감상할 차례다. (영화 장면들이 잔혹해서 예술 작품으로 대신한다.)

 

작품 번호 1, 모성의 색

영화1 (2).jpg EXIF Viewer소프트웨어Windows Photo Editor 10.0.1001촬영일자2019:10:08 15:10:55

 

 

첫 작품은 고장 난 차량 때문에 갓길에 주차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던 여성을 재료로 후안 그리스의 “어머니”라는 작품을 재현하려 했다. 미술이 오랫동안 색을 다루었듯이 후안 그리스도 다른 작품에서는 색을 폭넓게 다루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단조롭게 다뤘다. 후안 그리스와 그의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그가 생각하는 모성을 색으로 보자면 너무나도 기계적이다. 평면에 사물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려 했던 그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성을 입체적으로 구축하는데 성공적이었는지도 회의적이다. 후안 그리스가 모성을 기계적 생산이라는 느낌으로 그려냈다면 잭은 여성의 외투와 혈액의 붉은 색상으로 모성을 강조하려 했다. 잭은 후안 그리스처럼 색을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모성의 느낌을 정확히 표현하려 한 것이다. 기계이지만 재료를 얻고 작품을 완성하는 고장난 잭도 붉은 색이다.

 

작품 번호 2, 욕망의 색

피카소 꿈.jpg

 

두 번째 작품은 남편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중년 여성을 재료로 피카소의 “꿈”을 재현하고자 했다. 잭의 작품에는 피카소의 꿈과 다르게 욕망을 부추기는 색을 제거했다. 피카소의 작품을 욕망으로 해석한 것 같다. 피카소가 10대 소녀 마리 테레즈를 성적인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렸다면, 잭은 성욕을 제거하고 금전적인 욕구만 남은 중년 여성으로 교체했다. 성욕의 색채가 아니라 물욕의 단조로운 흑백으로 표현했다. 피카소가 마리 테레즈의 얼굴에 그려 넣은 피카소의 성기를 잭은 지워내고 싶었는지 재료였던 여성의 얼굴을 지웠다. 

 

작품 번호 3, 섹시즘의 희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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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작품은 진주 귀걸이를 한 여인과 거리의 여인을 재료로 폴 맥카시의 작품을 재현하려 했다. 폴 맥카시는 현실 세계의 폭력성을 방송과 언론이 보고 들을만한 것으로 가공하거나 포장해서 제공하는 것과는 다르게 직접적이며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인다. 영화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기법이면서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서 전달하려 하는 주제를 관통한다.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만연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재현하려 했다. 섹시즘이라는 폭력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재료가 된 여성과 일상에서 가해지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같은 섹시즘에 희생당하는 두 여인을 재료로 한 작품이다. 이 글에서 제시한 맥카시의 작품보다 더 적합한 작품이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으로 대신했다.

 

작품 번호 4, 출산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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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작품의 재료는 어머니와 두 아이들을 재료로 폴 맥카시와 로버트 고버의 작품을 섞어 재창조하려 했다. 그런데 이 재료들을 원하는 질감을 얻으려 총기로 세 모자의 사냥이라는 작업을 거친다. 무차별 총격과 다르게 사냥은 대상의 가장 취약한 부위를 찾는 작업이다. 짐승이라면 어미를 쏘아야 남은 두 새끼가 어미 곁을 떠나지 않는 습성을 이용해 사슴 셋 모두를 잡을 수 있지만, 인간인 세 모자는 사슴과 달랐다. 사슴처럼 어미와 남은 새끼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아이를 살피려 엄마는 아이 곁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다가간 것이다. 엄마를 따라가는 아이를 쏘아 재료를 얻었다. 짐승이라는 모성은 후안 그리스가 묘사한 것처럼 기계적이다. 새끼 곁을 지키는 것보다는 자신이 살아 남아 또 다른 새끼를 낳으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성은 아이를 생산하는 능력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개체를 생산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신의 일부가 떼어져 나가 나와 유사한 어떤 존재라는 의미인 것이다. 출산율 저하가 사회 문제라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점이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은 그 의도로 제작됐다고 보인다. 

 

작품 번호 5, The House That Jack Built

개빈 터크 비닐봉지.jpg

 

 

 

잭의 마지막 작품인 House(집)은 개빈 터크의 Trash(쓰레기)라는 작품으로 먼저 설명할까 한다. 이 검은 비닐이 예술작품일까? 개빈의 작품 Trash를 전시관 아무 곳에나 놓아두었더니 사람들은 눈여겨보지도 않았으며 검은 비닐에 잘 싸여있는 것이 쓰레기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불결한 것으로 간주하고 피해 가려 했다. 그것이 개빈 터크의 의도였다. 공공장소에 전시할 목적으로 쓰레기 비닐을 재현한 것이기에 안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쓰레기가 담겨있지 않았다. 이것이 개빈 터크의 Trash와 생활 쓰레기와의 차이다. 개빈 터크의 쓰레기를 안다 하더라도 어느 미술관의 구석진 곳에 이와 같은 것이 놓여있는 것을 본다 하더라도 또다시 누군가에게 버려진 어떤 쓰레기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의 보는 방식은 관습적 시선에 의해 좌우되는 편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경험과 관습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그게 무엇이건 간에 안의 내용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개빈 터크의 작품이 비닐 밖의 시선을 이용했다면 잭(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비닐 안쪽의 시선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래서 앞서 네 작품은 여성 밖에서 바라본 여성폭력에 관한 작품들이라면 마지막 작품은 여성 안에서 바라볼 때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관한 새로운 대답을 찾으려는 시선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그럴 수 있기란 매우 힘들다. 남성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히틀러에 관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발언은 이와 관련된 발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발언 만으로 나치주의자라거나 나치주의자를 옹호하는 것으로 확신하며 비난만 했지 그의 내면을 확인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다시 영화의 결말로 가보면, 

 

잭은 그동안 모은 인체 재료들로 작은 오두막을 짓는다. 살아가는 집이라기보다는 집이라는 개념을 완성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실제 우리가 거주하는 집은 노화되는 재료들의 집합이다. 잭이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인체 재료들도 노화되고 부패하는 재료들이다. 그 집 안에 살아가는 인간도 노화되고 부패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안에서 삶을 확인할 뿐 폐기라는 죽음은 발견하지 못한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은 실제로는 이렇다. 누군가 살다 죽는다. 그의 후손 혹은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집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망각이라는 기억의 부패 과정을 거쳐 전에 살던 삶은 잊힌다. 그리고 새로이 살게 된 사람들도 이것을 반복하는 것이다. 집의 내부는 이 과정의 연속이다. 잭은 집이 가진 최종적인 운명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완성하려 했으며 그것이 The house That Jack Builtd이다. 

영화4.jpg

 

기괴하고 흉측하지만 올릴 수 밖에 없는, 마지막 다섯 번째 작품인 잭이 지은 집은 정교하게 디자인된 고딕적 건축물이다. 지붕에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와 최후의 만찬에서 가운데에 앉아있는 예수로 장식되어 있으며 아래 현관 쪽에는 성모 마리아와 두 천사가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종교적인 건축물이라고 추측을 할 수 있다. 신을 위해 성당을 짓고 그 아래에서 신성으로 인간 자신을 감춘다 하더라도 유한성은 감춰지지 않는다.

 

소멸에서 벗어나 영원을 얻을 방법 중에 하나는 예술에 의해서다. 시대를 달리해도 복원이나 보수라는 방식으로 동시대적 젊음을 유지하는 것은 예술로 평가되고 분류된 것들이다. 쓰레기처럼 폐기되고 부패해서 소멸해야 할 인간의 신체가 재료가 되어 예술의 한 부분으로 참여해서 생명력을 약속 받는 것 중에는 영화가 있다. 누구나 아는 것이지만, 영화도 영상예술의 한 양식이다. 참여한 배우들과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들, 그리고 감독이 전달하려 했던 동시대 문제의식은 영화 안에서 영원성을 부여 받는다. 기괴하고 기묘한 방식으로 영상예술의 색다른 시도가 살인마 잭의 집인 것이다. 영화의 결말 부분은 이 의도를 명확히 하려 단테의 신곡 장면을 재현했다. 오래전 단테가 피렌체인들을 자신과 함께 신곡이라는 소설로 영원히 지옥에 가뒀듯이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자랑할 만한 미술 작품과 음악 그리고 감추고 싶은 시대의 문제의식을 영상예술인 영화라는 타임캡슐에 담아 먼 후대에 전하려는 것이다. 시간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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