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역사를 배우는 이유와 같이, 문학과 영화에서 과거를 재현하는 이유도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역사를 통해서 현재를 이해하려는 이유는 과거에 매어 있거나 현재에 머물러 있으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첫 작업은 과거를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과거를 검토하는 방식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것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시간의 리듬감으로 말해지는 것들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정확히 옳은 말이 아니더라도 역사를 시간의 리듬감으로 말하는 이유는 이해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용이한 이해는 다른 누군가에게 납득시키기 쉬우며 보다 더 넓은 대중적 파급력을 갖는다. 시간의 리듬감으로 말해진 역사의 이해는 결국 새로운 미래를 설정하기 위한 대중적인 힘을 얻으려는 것이다. 이해된 과거와 현재를 토대로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역사에서도 그렇겠지만 문학이나 영화에서도 잘 쓰이는 방식이다. 그런데 역사와 달리 문학과 영화는 과거의 심정心情까지 가져오는 작업이다.

 

 

역사를 다루는 영화에서 사료에 의해 고증 가능한 사건을 가져와 재현하는 일은, 시간과 돈이 들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과거의 심정心情까지 현재로 끌어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현한 박물관이나 민속촌처럼 고증만 한 것은 관객의 역사관이나 지식에 바탕을 둔 상상적 심정에 기댈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심정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관객에게 고증의 확실성과 역사 지식을 검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효과와 색채 언어로 느끼도록 한다. 영화 “남한산성”이 그렇다. 

 

영화의 시선과 색

R1280x0.jpg

영화의 한 장면

 

남한산성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자연과 인간을 산수화의 색채와 시선으로 촬영됐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점 때문에 관객은 과거로 빨려 들어간 듯한 착각을 하겠지만 영화는 과거를 현재로 끌어 왔다. 남한산성은 평면적이면서 이원적인 수묵화의 명도 대비로 자연을 표현하고 민화의 채도 대비로 삶의 생동감을 표현했다.

 

자연은 수묵화처럼 담담하게 그려졌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레버넌트The Revenant가 그랬던 것처럼,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자연을 표현하는 데에는 채색화보다는 명도 대비인 수묵화적인 표현이 더 적합하다. 짙게 갈아낸 먹으로 강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하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그려지는 수묵화처럼. 

 

과거의 삶을 끌어 온 방식은 채도 대비를 통해서다. 마이파더, 도가니, 수상한 그녀 등의 영화에서 인간 내면을 배우의 몸으로 시각화하는 작업을 해온 황동혁 감독과 스탭들은 다시 한 번 색채를 통해 옛 사람의 삶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시선의 높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시선의 높이와 수묵화, 그리고 전통 색채어를 통해서 옛 심정을 끌어 오려 했다.

 

시선, 그리고 높이

 

이념의 시선

사현파진 백만대병도.jpg EXIF Viewer소프트웨어Windows Photo Editor 10.0.1001촬영일자2019:07:08 07:42:08

 

사현파진 백만대병도, 국립중앙박물관

 

전진前秦(314 -394년)의 부견이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90만 대군을 이끌고 동진東晉(317 - 420년)에 쳐들어 갔으나 비수에서 8만여의 군사였던 동진의 사현에게 대패한 전쟁, 사현파진 백만대병도를 그려오게 한 것은 숙종(41년, 1715년)이었다.

 

전진의 군사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동진의 부견을 쫓아가고 있다. 용포를 두른 부견은 병사들을 뒤로한 채 놀라움에 입이 벌어져 저 멀리 눈 덮인 산으로 황급히 달아난다. 설산은 중국 북방의 부견의 영토를 의미한다. 비수대전은 한족이 북방민족의 침공을 물리친 전쟁이었다. 숙종은 그날을 눈에 담고 싶었다. 왼쪽 상단에 숙종은 사현파진도에 시 한 편을 이렇게 적어 넣었다. 

 

晉時安石有高名 : 진(晉=東晋) 나라의 사안(謝安, 동진의 재상이자 사현의 숙부)은 높은 명성이 있어
 坐却符堅百萬兵: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백만 병사를 앉아서 물리쳤다.
 靑岡一潰旌旗倒: 청강(靑岡)에서 부견의 전진 군대가 궤멸되자 깃발이 거꾸러지고
 鶴喉風聲走者鶯: 학이 외치는 소리와 바람소리만 들어도 적들은 놀라서 달아난다.

 

절파법으로 그려진 산천으로 전쟁의 긴박감을 나타냈으며 소나무는 산수화처럼 기의적이며 기표적인 표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내부가 밝아지는 기법으로 시각적 사실감을 주었고 병사들은 강물처럼 웅대하게 흐르듯 그려졌다.

 

권력과 문명의 정점이었던 왕의 시선은 세상과 역사를 아래로 펼쳐봐야 했다. 조선시대의 가장 무거운 형벌인 목숨을 앗아가는 참수와 같은 형벌로 인식되었던 것이 북방의 오랑캐 땅으로 버려지는 일이었다. 반문명인 오랑캐를 몰아내는 것은 조선이라는 문명을 지키는 일이었다. 숙종은 사현파진도를 통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바닥으로 떨어진 왕의 권위와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과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인조(박해일)의 시선은 변한다. 높다가도 낮아지며 낮다가도 같아진다.

 

이념의 색

인왕제색도.jpg EXIF Viewer소프트웨어Adobe Photoshop CC 2017 (Macin사진 크기4449x2583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

朝雨夕晴조우석청, 아침에 비가 오더니 저녁에는 맑게 개었다. 1751년 5월 25일(영조 27년)의 날씨를 승정원일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76세의 노화가는 동문이자 선배인 사천 이병연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그의 집을 찾았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르던 비는 이병연의 집에 당도할 무렵 그치기 시작했다. 겸재의 걸음을 더디게 했던 것이 미안했던지 운무는 슬그머니 인왕산을 빠져나간다. 이병연의 병세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이병연의 쾌유를 기원하며 겸재는 한 폭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왕제색도는 그날, 그렇게, 그 마음으로 그려졌다. 그림에서 오른쪽 하단에 크게 보이는 큰 지붕의 집은 스승 김창흡의 집이며 그림 중앙에 작게 그려진 곳이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린 이병연의 집이다. 행여 죽어 하늘로 떠나지 못하게 이병연을 인왕산에 매어 놓고 싶었던지 하늘을 산 정상에서 잘라낸다. 하늘로 떠나려는 이병연을 붙잡기라도 하듯 붓은 산 정상에서 힘차게 내렸다. 하지만 정선의 간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이병연은 81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인왕제색도는 실경實景에 마음을 더해 그렸다. 겸재뿐만이 아니라 동시대 미술가들의 관심은 중국화풍을 벗어난 한국적 화풍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산수화기 한 번도 보지 못한 중국의 풍경을 중국 화첩을 보고 따라 그리거나 상상해서 중국 회화 기법으로 그려졌었다면, 정선을 비롯한 동시대 화가들은 조선만의 화풍을 일으키고 싶었다. 정선이 다른 화가들에 비해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실경을 시도했으며 정선의 기법(묵찰법, 겸재 정선이 인왕산의 바위를 그릴 때 사용한 기법. 붓을 뉘어 쓸어 내리는 방식)으로 자연을 그린 인왕제색도는 조선 후기 한국 진경산수화로의 전환기에 대표적인 그림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의 선비들은 사군자와 산수화만을 그릴 수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숨겨야 했다. 사군자화와 같이 이념의 시선으로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하거나 유교사상으로 세상을 재구성하는 것만 허용됐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변화가 감지된다. 중국과 유교 중심주의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 대안이 되었던 것이 민화다. 조선 후기에는 이념적인 그림보다는 실용적이면서 장식적인 민화를 선호했다. 하층민들이나 보는 그림이라며 멸시하던 하위 시각문화였던 민화가 조선 후기에는 상류층에게도 사랑 받게 된다. 

 

삶의 색

화조도.jpg

 

화조도 8첩 병풍. 조선 민화 박물관

 

궁내宮內에 선 하나 긋는 것부터 건물의 소소한 칠까지 도맡아 하던 사람들이 도화서의 화원들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417 - 1470년경 왕의 직제 기구였던 도화서가 예조 산하의 도화원으로 강등되었다. 화원이 된다는 것은 출세와는 반대였다. 양반, 중인, 상민, 천인 중에서 궁중화원은 태생이 천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에 가까운 천시를 받았다. 화원이 된다는 것은 부와 명예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그날그날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들은 그림에 재능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실력을 감춰야 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 좋아한 양반이 화원이 되려면 신분을 포기해야 했다. 

 

조선 중기 이후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다시 시각문화의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숙종은 화원의 지원책을 궁리하였고 영조와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화원의 수요가 늘어나 녹봉을 받는 화원의 수가 늘어났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것과 같다. 조선 후기에는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화원의 그림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으며 화원의 신분도 양반과 중인 사이로 상승한다. 이런 흐름에서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등이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가 현감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화원들의 그림은 서민계층뿐만이 아니라 양반층에서도 수요가 늘어나게 됐다. 

 

조선 후기 시각문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상인과 중인계층이었다.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중인과 상인들은 그들의 현실적 욕구인 부귀와 무병장수를 충족할 그림을 필요로 했다. 서양 상인들이 천국의 문을 열기 위해 예술을 이용했다면 조선인들은 현세적 구원과 삶의 균형을 위해 예술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채색화는 주술적이며 음양오행적인 구도와 색을 사용하게 된다. 

 

작자 미상. 대부분의 민화들은 누가 그렸는지 모른다. 안료(광물)와 염료(동식물)로 색을 만들 줄 알고 다룰 줄 알았던 화원들이 그렸다는 정도만을 추측할 뿐이다. 그림의 품질과 완성도는 가격이 결정했다. 궁의 화원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그림에 남기지 않았으나 신분이 높은 대신들이나 양반들에게 그려주는 그림에는 간혹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궁에 소속된 화원이 되지 않더라도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거나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되면서 자신이 원하는 그림만을 그리려는 화가가 등장하기도 했다. 단원 김홍도와 같은 뛰어난 실력의 화가들은 소문을 통해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화사가 되기도 했다. 

 

색이 변하지 않는 광물로 만들어진 안료는 중국과 일본에 의존했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 조선 후기에 포항과 울산에서 안료 광물이 발견되기는 했지만 그 양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의 그림에는 동물과 식물에서 얻어낸 염료가 그림에 주로 사용됐다. 민화 채색에서 주술적 의미를 가져 중요한 색이었던 붉은색과 푸른색은 소량의 광물로 칠해지기도 했지만 대체로 염료를 사용하게 된 이유다. 색은 값비싼 것이었다. 

 

민화에서 음양오행적이자 주술적이며 눈을 가장 많이 자극하는 붉은색과 푸른색을 영화에서도 사용했다. 김상헌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공의 피는 붉은 색이 민중 삶의 색으로 영화에서 사용될 것임을 알린다. 조선시대 붉은색은 왕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예외적인 경우에 사용되었는데, 군복과 무당의 무의巫衣, 여성들의 저고리와 치마 중 어느 한 곳 그리고 그림에서 허용되었다. 영화에서 붉은색은 대장장이 날쇠(고수)의 쇳물로 표현되기도 하며 성벽 위에 지핀 모닥불이기도 하고 고기의 살점과 피의 색으로 사용됐다. 

 

녹색을 포함한 푸른색 계열도 주로 양반층이나 대신들의 의복에 사용되던 색이었다. 왕의 붉은색 의복과 신하들의 푸른색 계열(녹색도 포함)의 의복은 음양오행의 균형을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됐다. 영화에서 푸른색이 사용되는 곳은 주화파인 최명길(이병헌)의 색이기도 하며 언뜻 보이는 조선의 하늘색이기도 하다. 

 

영화의 결말, 그리고 우리의 현재

한반도 (2).jpg EXIF Viewer소프트웨어Windows Photo Editor 10.0.1001촬영일자2019:07:12 13:12:12

 

NASA의 한반도 사진, 출처 구글

 

영화는 시선을 높임으로서 몸이 낮아진 인조의 항복의식과 백성의 삶을 가슴에 품지 못한 척화파 김상헌의 자결로 끝난다. 시선의 높이와 색채로 과거의 심정을 끌어 온 시도가 성공적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관객마다 영화에 대한 생각과 느낌이 달라서, 누군가는 한 편의 재미있는 사극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현재의 재현으로 보여 사정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자괴감에 깊은 탄식을 쏟아냈을 수도 있다. 

 

나사(NASA)가 촬영한 한반도의 사진을 보고 누군가는 한반도의 반절인 북한의 낙후된 모습이 보인다 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한반도가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 섬과 같이 됐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영화 남한산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반도의 고립이다.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의 지세가 물을 두르고 산에 기댄 장풍국이라고는 하나, 규국이 작아서 품이 좁고,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목이 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또 성이 산에 기대어 있다 하나 성 밖 산봉우리에서 손샅처럼 굽어 보여 내리쏘는 적의 화포를 피할 길이 없고, 성 안 농토의 소출이 백성들의 일용에도 못 미쳐서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 있고, 도성과 민촌이 가까워서 멀리서 온 적들이 약탈과 노획으로 군수를 충당하며 머물 수 있으니 병서에 이른 대로, 막히면 뚫기가 어려워서 멀리 도모할 수 없고,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 없으므로 움직이면 해롭고, 시간과 더불어 말라가니 버틸수록 약해져서 움직이지 않아도 해롭고, 버티고 견디려면 트인 곳을 막아야 하는데 트인 곳을 막으면 안이 또한 막혀서, 적을 막으면 내가 나에게 막히게 되니 막으면 갇히고, 갇혀서 마르며, 말라서 시들고, 적이 강을 차지하니 물이 적의 쪽으로 흐르고, 안이 먼저 마르니 시간이 적의 편으로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는 지관들도 있었는데.

김훈의 남한산성 중에서 

 

역사는 반복된다기보다,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과 두려움에서 출발한 비겁함, 갈린 이념과 탐욕으로 만들어진 무기력함과 같은 우리의 못난점 때문에 오래 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다시 맞닥뜨리는 일이다. 여전히 지속될 것만 같은 우리의 미숙함과 부족함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음은 종종 그것들을 회피하게 하거나 무시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언젠가는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때로는 마음을 이성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깎아 내리기도 하지만, 마음은 세상을 보게 하고 담아내는 곳이기도 하다. 불가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승려 둘이서 깃발에 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 승려는 깃발이 흔들렸다 하고 다른 승려는 바람이 움직였다고 말한다. 그러자 지나가던 다른 승려는 그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인 것을 보려 했다고 말한다. 영화 남한산성이 과거의 심정을 가져오려 한 이유는 명확하다.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그리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반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는 것, 심정의 크기만큼의 용기와 울림만큼 단합된 힘을 갖게 하려는 의도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국가 최후의 보루도 시민의 힘에서 나온다. 영화 남한산성은 시민의 힘을 끌어내기 위해 옛 시각기법과 색채로서 옛 심정에 감각적으로 다가가게 하려 한 이유다.

 

PS – 근자에 어떤 사람들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런 행동은 옳지 않다”라고 말한다. 틀렸다. 그가 이해한 것은 자신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해관계이지 누군가의 심정을 알아낸 것은 아니다. 심정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본 과거는 다를 수도 있다.

이메일 로그인

이메일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