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傾聽)

2018.05.08 16:28 305

경청(傾聽)

 

[명사] 남을 이해하려 애쓰는 자세. 얼핏 남 좋은 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인간에 대한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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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로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는 경청은 결국 상대를 존중함과 동시에 나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세이기도 해.

 

 

그러니까 상대의 얘기를 집중해 들음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려는 행위이면서, 또한 상대의 얘기를 듣고 내가 오판하는 걸 최대한 방지할 수 있는 자기보호의 자세가 경청이라는 얘기야.

 

 

간혹 경청의 자세를 연장자나 권력자에게 취해야할 일종의 굴종적 예의로 오해하곤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은 거지. 타인의 의사표현에 어떤 입장을 취하려면 당연히 타인에 대한 뭔가를 이해하고 있어야 가능한 거잖아. 이해한 후의 결과가 공감이 될지, 비난이 될지, 침묵이 될지 뭐가 될지는 모르지만 말이야.

 

 

결국 경청은 상대를 이해한 후 그에 화답할 의사표현을 결정하기 전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탐구자세인 셈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경청은 굴종적이긴커녕 오히려 상대를 냉철히 판단하기 위한 무시무시한 뭔가에 더 가까울 지도 모르겠어. 그렇잖아. 내 얘기에 토를 달고 반박할 사람은 몰래 스마트폰으로 야동 보는 철수가 아니라 반짝이는 눈으로 내 얘기를 경청할 영희일 거잖아.

 

 

고로 이제라도 미운 놈이 무슨 얘기하면 말허리 끊지 말고 오히려 경청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응징을 하더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 테니까. 자료 수집을 제대로 해야 전략이 나올 거잖아. 손자병법서의 ‘지피지기면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걸 테고.

 

 

물론 반대로 경청을 통해 내가 오해하고 있던 걸 풀 수도 있고, 알지 못했던 걸 알게 될 수도 있을 거야. 그럼 더 좋지 뭐. 이제부터라도 사이좋게 지내면 될 테니까.

 

 

 

<모모>/미하엘 엔데/한대희/비룡소

 

 

경청의 미덕과 관련해서 참고하면 좋을 책으로 <모모>가 있어.

 

 

모모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이인데 동네 사람들에게 정말 인기가 좋았지.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모모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이유는 모모가 동네 사람들의 각종 근심 걱정을 해결했기 때문이야.

 

 

동네 사람들이 온갖 근심, 걱정, 갈등을 얘기하면 모모는 정말 열심히 들었어. 열심히 들은 후 모모가 솔로몬 왕처럼 현명한 해결책을 제시했던 건 아니야. 모모는 한 마디도 안 해. 그저 열심히 듣기만 할 뿐. 근데 희한하게도 문제가 해결 되곤 했어. 절대 안 풀릴 것 처럼 보였던 고민과 갈등들이 말이야.

 

 

혼자 고민하던 사람은 ‘스스로’ 해결책을 깨달았고, 함께 다투던 사람들끼리도 다툼의 근본 원인을 ‘스스로’ 헤아린 후 서로 화해했거든. 이 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스스로 해결했다는 대목 말이야.

 

 

어째서 동네 사람들은 그 전까지는 해결할 수 없던 문제를 모모 앞에서 얘기를 하고나서야 비로소 해결할 수 있었던 걸까. 그것도 스스로.

 

 

어쩌면 이런 건지도 몰라.

 

 

세상이 변하듯 고민과 다툼도 곧잘 변하곤 해. 처음엔 이게 문제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게 문제가 아니라 저게 문제다라는 식으로 말이야.

 

 

사실 동네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를 고민했던 게 아니라, 자기 문제를 고민하는 나를 지켜보는 주변 사람의 시선을 고민했던 게 더 컸던 건지도 몰라. 특정 상대와 싸웠지만 어느 순간 당사자간의 싸움이 아니라, 그 싸움을 지켜볼 불특정 다수의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으로 변했던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다시 말해 혼자의 고민이든 남과의 다툼이든, 어느 순간 그 고민과 다툼 자체가 중요 한 게 아니라, 고민과 다툼을 통해 드러날 나의 존재감이 중요했던 것일 수 있어. 이런 고민이 있다는 걸 털어놓았을 때 사람들은 나를 비웃지 않을지, 설령 큰싸움 후에 내가 먼저 사과를 할 경우 사람들은 나를 무르다고 무시하지 않을지 등등. 고민과 다툼의 이유가 애초 원인과는 상관없이 그 고민과 다툼에서 발생할 존재감의 이익 여부로 곧잘 본질이 변질 되곤 한다는 거야.

 

 

왜냐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간혹 속세를 등지고 깊은 산 속에서 홀로 사는 이들도 있다 들었지만 이건 굉장히 특수한 경우일 거야. 대부분은 아무리 속세가 지랄맞아도 어쨌거나저쨌거나 다른 사람들과 부대끼며 삶을 살아내지. 외로움보다는 차라리 불평등이 더 견딜만 하니까. 어쩌면 그래서 인류 역사가 존속된 건지도 몰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도 부당했던 역사들 말이야.  

 

 

아무튼.

 

 

고민과 다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존재감의 이익은 굉장히 다양해. 싸워 이겨 똑똑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힘 센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먼저 양보해 착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그때그때 달라지는 거지. 무엇때문에 고민하느냐, 누구와 싸우느냐, 그리고 누가 지켜보느냐 등에 따라서 말이야.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모모는 경청을 할 뿐, 판단은 하지 않는 관객이었어. 바꿔말하면 모모는 마을 사람들에게 왜곡이 없는 맑고 큰 거울 역할을 한 셈인 거지.

 

 

그래서 사람들은 적어도 모모 앞에서는 지켜보는 관객이 나를 무시하거나, 비웃거나, 왜곡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던 건지도 몰라. 모모는 그저 열심히 들을 뿐이니까.

 

 

또 관객이 두렵지 않으니까 문제를 (나에게 유리하게)왜곡하거나 미화시킬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를 얘기할 수 있었던 거지. 결국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니 그에 걸맞은 적절한 해결책도 스스로 구할 수 있게 된 것일 수 있고 말이야.

 

 

바로 그런 점에서, 경청은 남의 얘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수동적 행위 같지만, 어쩌면 상대의 얘기를 열심히 듣는 그 자체가 상대에게 매우 적극적인 의사표시를 하는 행위일 수도 있어. 잘 들을 테니, 너도 잘 얘기해보라는 그런 의사표시 말이야. 격려일 수도 있고 경고일 수도 있어.

 

 

진실을 말하려는 이에겐 격려가 될 테고, 거짓을 말하려는 이에겐 경고가 되는 게 경청인 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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