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存在感)_4

2018.04.09 14:34 448

존재감(存在感)_4

 

[명사]존재하므로 느끼는 감각. 나에 의한 존재감과 남에 의한 존재감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방식에 따라서는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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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

 

 

 

 

과 어둠이 나뉘듯 존재감도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으로 나눌 수 있어.

 

 

양과 음, 선과 악, 긍정과 부정, 사랑과 증오 등 서로 상반된 것으로 보이는 대립항 중 전자의 성격을 갖는 걸 빛의 존재감이라 부르려 해. 그러니까 편의상 빛의 존재감이라 칭하는 것일 뿐 양의 존재감, 선의 존재감, 긍정의 존재감, 사랑의 존재감 등으로 불러도 상관 없다는 얘기야.

 

 

쉽게 말해 빛의 존재감이란 나 이외의 다른 존재에게 이익(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을 줌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유형을 말해. 물론 어둠의 존재감은 그 반대를 의미하고. 다른 존재에게 손해(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를 끼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하려는 유형이지.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엔 대체로 빛의 존재감이 될 것 같아. 갓 태어난 아기는 순수하고 착하니까 한줄기 빛과 같아서 그렇다는 건 아니야. 현실은 그렇게 상투적이지 않거든.

 

 

아기가 빛의 존재감을 갖는 이유는 아기가 빛의 존재감을 갖고 있어서기도 하지만 오히려 주변 다른 존재들에게서 빛의 존재감을 강력하게 유발하기 때문이야. 다시말해 아기는 매우 강력한 빛의 존재감을 발산함과 동시에 주변사람들의 빛의 존재감을 흡수도 한다는 거지.

 

 

왜냐면 약하니까. 약하기 때문에 갓 태어난 생명들은 존재 유지를 위해 반드시 주변의 도움과 보살핌을 필요로 해. 즉 부모 혹은 다른 주변인이 빛의 존재감을 발휘해야만 갓 태어난 생명들은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야. 그렇잖아. 그렇지 않을 경우 아기가 생존할 확률은 극히 드물거나 큰 상처를 지닌 채 자라게 될 거야.

 

 

물론 부모가 아기의 생존만을 위해서 빛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건 아닐 거야. 마찬가지로 부모가 아기에게 얻는 빛의 존재감도 어마어마 하거든. 아기의 웃음, 신뢰의 눈빛, 통통한 살내음, 혹은 존재 그 자체가 부모에게 주는 기쁨 말이야. 부모 역시 빛의 존재감이 됨으로써 아기에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    

 

 

여기서 주의할 건, 아기가 먼저 (빛의 존재감을) 요청했으니까 부모가 (빛의 존재감으로) 응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거야. 그러니까 순서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내가 자주 예를 드는 ‘마주선 거울’을 떠올리면 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동시에 마주쳤을 때 어느 거울에 먼저 상이 비친 건지를 따질 수 없듯, 존재감 역시 그 순서를 따지는 건 어려워.

 

 

연약한 아기가 태어남으로써 빛의 존재감이 시작되는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 아기가 한 점에 불과했을 때부터 정성껏 태교를 했던 부모 입장에서는 부모가 먼저 태아를 상대로 빛의 존재감을 발휘한 거겠지. 하지만 또 애초 사랑스런 애기를 상상하며 부모가 섹스를 했던 거라 가정하면 당시엔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상속 아기가 빛의 존재감을 발휘한 걸 수도 있어.

 

 

고로 누가 최초로 빛의 존재감을 발동했느냐의 순서를 따지기는 어려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다보면 우주 탄생의 비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야.

 

 

아무튼.

 

 

그렇다면 태어나기를 빛의 존재감으로 태어난 것 같은 아기는 앞으로도 계속 빛의 존재감을 유지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아. 누구도 빛의 존재감으로 영원할 수는 없을 거야. 이 글을 읽을 독자들도 한 때는 틀림없이 갓 태어난 아기였을 테니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거야.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건 변하기 마련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잖아.

 

 

아기는 커가면서 주변으로부터 빛의 존재감이 되기도 힘들고, 그걸 얻기도 점점 어려워질 거야. 쉽게 말해 사랑 받기가 예전만 못해지는 거지. 이전엔 존재 자체로 사방에서 빛의 존재감이 반사되어 돌아왔는데 크면서는 음식을 흘리지 말아야 하고, 대소변도 가려야 하고, 심지어는 영어 수학도 해야 되는 등 점점 어려운 미션들이 주어져.

 

 

더 크면 보다 복잡한 조건들이 추가 되겠지. 대학을 가야 하고, 돈벌이를 해야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등등.

 

 

물론 주변의 기대에 늘 부응할 수 있다면 빛의 존재감은 연장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그게 쉽나. 설령 미션을 모두 클리어 했다 치더라도 생각지 못한 문제를 만날 수도 있어.

 

 

‘나는 왜 남들이 원하는 존재가 되려고만 했던 걸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대체 뭐였던가?’

 

 

뭐 이런 식의 자기에 대한 회의 말이야. 이때는 설령 주변에게는 여전히 빛의 존재감으로 여겨질지 몰라도 자기 내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거지. 그러니까 어떤 형식으로든 최초 빛의 존재감이었던 아기는 언젠간 좌절을 맛보게 될 거라는 얘기야. 점점 자주, 점점 크게.

 

 

그리고 좌절은 아이를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몰아넣을 가능성이 높아. 순응하는 아이와 반항하는 아이.

 

 

순응의 아이는 어떻게든 빛의 존재감을 회복하거나 다른 종류의 빛의 존재감이라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 반면 반항하는 아이는 어둠의 존재감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할 가능성이 높아. 어쨌든 나의 존재감은 지속되어야 하는데 빛의 존재감이 좌절됐으니 어둠의 존재감에 의지할 수밖에.

 

 

영화 <더 헌트>를 예로 들 수 있어.

 

 

5살의 유치원생 클라라는 새로 부임한 선생님 루카스를 무척 좋아했어. 좋은 선생님이기도 했지만 아빠의 둘도 없는 친구기도 했지. 그러던 어느날 짖궂은 오빠를 통해 19금 사진을 본 클라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선생님을 상대로 그 장면을 흉내내.

 

 

깜짝 놀란 선생님은 아이를 밀치면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말라고 주의를 주지. 선생님이자 아빠의 친구로서 루카스는 완벽하게 처신을 했던 거야.

 

 

하지만 클라라는 바로 거기서 묘한 상처를 받아. 아마도 자신의 호의(빛의 존재감)가 무시당한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 어쩌면 앞으로는 선생님이 나를 전처럼 예뻐해주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며 겁을 먹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래서 클라라는 고민 끝에 원장 선생님에게 이렇게 얘기하지.

 

 

“루카스 선생님이 저를 성추행했어요.”

 

 

선생님께 더욱 강력한 빛의 존재가 되고자 했던 행위가 좌절되자 선생님의 인생에 치명타를 가할 어둠의 존재로 돌변했던 거야. 물론 클라라에게 어둠의 존재감이란 개념이 있을리는 만무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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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볼게.

 

남자는 19세, 여자는 17세였어.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여자에게 남자는 성관계를 요구했지. 여자가 거부하자 남자는 공업용 커터칼을 들이대며 협박해 강제로 성폭행을 했어. 여자가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자 남자는 감옥에 가는 게 두려워 결국 여자를 목졸라 살해하고 말았어.

 

 

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남자는 죽은 여자의 시신을 훼손하기 시작했지. 시신을 욕조로 옮긴 뒤 공업용 커터칼로 토막을 내려다 여의치 않자 살점을 도려냈어. 칼이 부러지자 더욱 큰 칼을 구해 대략 16시간에 걸쳐 시신을 훼손했어.

 

 

그 과정에 친구에게 시신 사진과 함께 카톡을 보내기도 했어.

 

“작업 중이다”

“피 뽑고 있다”

 

 

또 SNS에는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지.

 

 

“내겐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이젠 메말라 없어졌다.

오늘 난 죄책감이란 감정 또한 느끼지 못했고

슬픔이란 감정 또한 느끼지 못했고

분노를 느끼지도 못했고

아주 짧은 미소만이 날 반겼다.

오늘 이 피비린내에 묻혀 잠들어야겠다.”

 

 

이 끔찍한 얘기는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일이야. 지난 2013년 경기도 용인에서 벌어졌던 사건 기사를 요약한 내용이지.


 

19세 남자에게는 심각한 정신질환이 있었던 걸까? 하지만 공부도 잘하고 악기도 잘 다뤘다고 해. 물론 정신질환이 시험 점수나 악기 연주와 꼭 관련 있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지능이 떨어져서, 상식이 부족해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라는 얘기야.

 

 

타고난 싸이코패스였을까? 하지만 싸이코패스라면 또 다른 범죄를 준비했겠지. 범죄과정을 친구에게 자랑하듯 알리고, 범죄 후기를 누구나 보는 SNS에 올리지는 않았을 것 같아.

 

 

결국 어둠의 존재감을 택한 결과였던 것 같아. 여자에게 섹스를 요구했지만 거부 당하는 그런 못난(?) 남자가 되기보다는 강간하고, 살인하고, 훼손하는 그런 끔찍한 악마가 되는 게 차라리 더 그럴듯한 존재가 되는 거라 생각했을 거 같다는 얘기야. 적어도 그 순간에는. 지금은 물론 후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 척 하며 형을 살고 있겠지만.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드니까 나도 마음이 불편해. 하지만 어둠의 존재감이란 게 작게는 거짓말부터 크게는 심각한 범죄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하고싶어 꺼낸 사례이니 이해해주기를 바래.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한 번 어둠의 존재감으로 흑화되면 다시는 빛의 존재감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아. 어쩌면 삶은 흑화와 백화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건지도 몰라. 빛의 위치에서 운이 없어 어둠으로 고꾸라지기도 하고 어둠에서 깨달은 바를 실천해 다시 빛으로 올라가기도 하는 거지.

 

 

이를테면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처럼 말이야.

 

 

배고픈 조카들에게 먹일 빵을 훔쳤다가 19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나온 장발장은 한 마리의 야수와 같았어. 내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은 증오심만 가득했지. 하지만 은쟁반을 훔쳐나오다 붙잡힌 장발장에게 오히려 은촛대까지 챙겨주던 미리엘 주교의 빛의 존재감 덕에 장발장 역시 빛의 존재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지.

 

 

<레미제라블>/빅토르 위고/정기수/민음사


 

결국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 역시 동떨어진 뭔가가 아니라 야누스처럼 두 얼굴의 한몸일 뿐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어차피 한 몸이니 그럼 빛이든 어둠이든 되는대로 살면 되는 거네? 뭐 이런 의도로 하는 얘기는 아니니까 말이야.

 

 

당연히 빛의 존재감을 지양해야 돼. 왜냐면 그래야 나도 행복해지고 남도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다만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야. 지금 내가 빛의 존재라 자만했다가는 한 방에 훅 갈 수도 있어. 현재 어둠의 존재라 해서 너무 자책하거나 좌절하지마. 그게 바로 경험해야만 깨닫는 지혜가 될 수 있으니까.

 

 

또한 이런 생각을 나에게만 적용해서는 안되겠지. 지금 휘황찬란한 빛의 타인도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르는 법이야. 현재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도 언제든 천사가 될 수도 있는 법이야. 내가 손을 내밀면 더욱 빨리 될 수도 있고.

 

 

물론 안 될 수도 있지. 하지만 이런 시행 착오는 충분히 의미 있어. 혹은 의미있는 일은 늘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만들어진다 말할 수도 있겠어.

 

 

더 이상 흔들림 없는 궁극의 빛의 존재감은 분명히 그렇게 만들어질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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