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存在感)_3

2018.04.03 12:39 400

존재감(存在感)_3

 

[명사]존재하므로 느끼는 감각. 나에 의한 존재감과 남에 의한 존재감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방식에 따라서는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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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에 의한 존재감과 남에 의한 존재감

 

 

1차 존재감과 2차 존재감이라 부를 수도 있겠어. 1차 산업과 2차 산업을 분류하듯 존재감도 주체에 따라 구분할 수 있을 것 같거든.

 

 

나에 의한 존재감, 즉 1차 존재감은 말 그대로 스스로 얻는 존재감을 의미해. 먹고 자고 싸는 생리적 행위를 통해 느끼는 존재감이 좋은 예가 될 거야. 물론 생리적인 거 외에 혼자 사색을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육체적인 거든 정신적인 거든, 생리적인 거든 실천적인 거든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감을 스스로 느끼는 존재감으로 분류하려는 거야.

 

 

남에 의한 존재감, 즉 2차 존재감 역시 말 그대로 나 이외의 다른 존재를 통해 느끼는 존재감을 의미해. 2차 존재감이란 마치 나르키소스가 연못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것과 같아. 연못을 보는 거지만 사실 연못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거지.

 

 

 

 

섹스 역시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일 거야. 자위가 아닌 섹스라면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할 테니까. 그 외 가정이든 학교든 직장이든 국가든 어떤 집단의 구성원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으로 2차 존재감을 경험하게 돼. 각자 교류의 깊이와 폭은 다르겠지만 어쨌든 교류를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다른 존재에 의한’ 존재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하지만 이런 분류는 사실 오류야. 존재감을 보다 구체적으로 얘기하기 위해 편의 상 나에 의한 존재감과 남에 의한 존재감을 구분했지만 구분하는 순간 모순이 발생해. 왜냐면 나 이외의 존재를 어디까지로 한정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거든. 바꿔 말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감이란 게 과연 있을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얘기야. 모든 존재는 반드시 다른 존재를 전제로 존재감을 느낀다는 거지.

 

 

예를 들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외롭게 도시락을 먹는다 쳐봐. 왜 요즘 이런 기사 많잖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심지어는 화장실에 숨어서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정말 외로움의 끝판왕이라 할만한 것 같아. 혼자 먹는 것도 외로울 마당에 혼자 먹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 아무도 없는 곳으로 숨기까지 하니 말이야.

 

 

하지만 뭔가를 먹잖아. 먹는다는 건 다른 생명을 섭취하는 거잖아. 그게 소든 돼지든 고등어든 배추든 쌀이든. 그러니까 존재 유지를 위한 가장 기본적 행위인 먹고 싸는 문제 역시 다른 존재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존재감이라는 거야. 나에 의한 존재감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남에 의한 존재감이기도 한 거지.

 

 

게다가 식재료만 존재인 게 아니지.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식재료를 가공한 누군가의 손길도 엄연히 존재해. 농부든 도축업자든 엄마든 백선생이든.

 

 

더 확장해보면 심지어는 숨는다는 것 역시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말할 수 있어. 그게 담벼락이든 벤치든 화장실이든. 그 공간을 만든 사람들과 원자재의 범위까지 확장하면 이건 뭐 우주 안에 살면서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감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어.

 

 

현재 나의 존재 자체도 그렇잖아. 그러니까 나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로 이어지는 인류 전체의 역사, 또 나의 부모와 부모의 부모로 이어지는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소비했던 수많은 다른 존재들의 역사가 함께 결합된 결과물이 나인 거잖아.

 

 

남에 의한 존재감도 마찬가지야. 내가 아닌 남에 의한 존재감이라고 해서 나 없이 만들어지는 존재감이란 건 없어. 당연하잖아. 하다못해 왕따를 당해 생긴 소외의 존재감이라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나 없이 만들어질 수는 없는 거니까.

 

 

다만 그런 불쾌한 존재감은 견디기 힘들고 싫기 때문에 아예 존재하지 말기를 바라다 보니 전체에서 일부를 분리 가능한 뭔가로 인식하고 싶어하는 거겠지.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나의) 만족스러운 상태를 지향하다 보니 만족이 곧 좋은 거고 급기야 옳은 것처럼 생각하잖아. 그래서 불만족은 분리의 대상이고 싶고. 하지만 그 둘은 분리가 불가능해. 불만이 만족을 부르고, 만족이 불만을 낳는 거지.

 

아니야. 이 표현도 뭔가 불완전해. 뭐가 뭐를 부르거나 낳는다고 하니까 역시 분리 가능한 것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잖아. 불만 안에 만족의 씨앗이 들어있고 만족 안에 불만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마치 주역의 태극도처럼.

 


 

태극도.jpg

 


 

음과 양이 서로를 쫓으며 한 덩어리로 뭉쳐있음과 동시에 음과 양에는 각기 반대되는 속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태극도 안에는 음 안에 양의 눈이 있고 양 안에 음의 눈이 있는 거지.

 

 

아아, 내가 원래 이런 어려운 얘기를 하려했던 게 아닌데. 아무튼.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상호 대립 같지만 대립도 아니고 협조도 아닌 이런 모순적 관계를 노자는 문(門)에 비유한 바 있어. 물론 노자가 존재감을 문에 비유했던 건 아니야. 도(道)를 문에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해(하지만 존재감과 도가 딱히 다른 의미일 것 같지는 않아).

 

 

道可道非常道, 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 명가명비상명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

故常無欲以觀其妙, 고상무욕 이관기묘

常有欲以觀其徼. 상유욕 이관기요

此兩者同出而異名. 차양자 동출이이명

同謂之玄. 동위지현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이렇게 말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를 거야. 나도 잘 몰라. 노자의 도덕경 강독을 하려는 건 아니니까 문(門)과 관련된 마지막 줄만 보자고.

 

 

玄之又玄, 衆妙之門. 현지우현 중묘지문

 

 

노자는 도를 두고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이것이 바로 온갖 것들이 들락거리는 문이로다(최진석 교수의 EBS 노자 강의에서 발췌한 해석).”라며 감탄해. 아니 문이 대체 뭐길래.

 

 

집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문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러면 혼란스러울 수 있어. 여기서 말하는 문은 길의 경계에 세워진, 즉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문이라 생각하면 돼.

 


 

문은 나가려는 것과 들어오려는 것들의 경계에 위치해. 그리고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은 서로 반대의 개념 같지만 그냥 상대적 개념일 뿐이지. 그렇잖아. A와 B의 경계에 위치한 문을 기준으로 본다면 A에 있는 사람에게는 B가 밖일 테고 B에 있는 사람에게는 A가 밖일 테니까. 안쪽의 개념도 마찬가지지. 그 사람의 위치에 따라 안과 밖은 달라진다는 얘기야.

 

 

게다가 A에 있는 사람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리고 B에 있는 사람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서로의 안과 밖은 다시 뒤바뀌게 돼.

 

 

따라서 문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고, 혹은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한 운명적 모순의 상징인 셈이지.

 

 

이는 다시 로마신화의 야뉴스(Janus)와도 일맥상통해. 야누스가 ‘문의 신(神)’으로 불리기도 하거니와 야누스는 앞뒤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이지.

야누스.JPG  

 

사람 놀래키려고 얼굴이 두 개인 건 아니야. 문이 갖는 모순적 상징을 뒤통수가 붙은 두 개의 얼굴로 표현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누구든 야누스의 얼굴과 마주할 수는 있어. 하지만 어떤 한 지점에서만 볼 수 있는 야누스의 얼굴 한쪽만 두고 ‘이것이 야누스다.’라고 규정한다면 그 규정이 얼마나 명백하건 간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모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거야. 왜냐면 다른 반대편의 야누스를 명백히 배제한 규정이 될 테니까.

 

 

앞서 예를 들었던 <데미안>에도 주역의 태극도, 노자의 문, 혹은 로마신화의 야누스와 유사한 상징이 등장해. 그 유명한 압락사스(혹은 아브락사스) 말이야.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사스.

-<데미안>/헤르만 헤세/전영애/민음사 p.123

 


 

압락사스가 뭐지? 혹은 압락사스가 언제부터 나 몰래 유명해진 거냐며 분통을 터뜨릴 독자가 있을 지도 모르겠어. 그런 분들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직접 읽어보거나  필자의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아. 

 


 

희열과 오싹함이 섞이고, 남자와 여자가 섞이고, 지고와 추악이 뒤얽혔고, 깊은 죄에는 지극한 청순함을 통해 충격을 주며. 나의 사랑의 꿈의 영상은 그러했다. 그리고 압락사스도 그러했다.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처음에 겁을 먹고 느꼈던 것처럼 동물적인 어두운 충동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이제 더 이상 내가 베아트리체의 영상에다 바친 것 같은 경건하게 정신화된 숭배 감정도 아니었다. 사랑은 그 둘 다였다. 둘 다이며 또 훨씬 그 이상이었다. 사랑은 천사이며 사탄이고, 남자와 여자가 하나였고, 인간과 동물, 지고의 선이자 극단적 악이었다. 이 양극단을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운명으로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맛보는 것이 나의 운명으로 보였다. 나는 운명을 동경했고, 운명을 두려워했지만, 운명은 늘 거기 있었다. 늘 내 위에 있었다.

-<데미안>/헤르만 헤세/전영애/민음사 p.128

 


 

결국 내가 하려던 얘기는 이거야. 존재감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 혹은 만족과 불만족의 관계는 ‘상호 배타의 관계가 아닌 상호 확장의 관계’라는 거지(이에 대해서는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에 대해 얘기하는 존재감(4)에서도 다시 언급될 거야).

 

 

그렇잖아. 배고픔 없이 배부름이 올 수는 없는 거잖아. 당장에라도 똥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절체절명의 위기 없이 쾌변의 행복이 올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럼 행복을 위해 일부러 밥을 굶고 일부러 똥을 참기라도 하라는 말이냐? 물론 그런 얘기는 아니야.

 

 

둘 중의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 뿐이야. 지금 고통스럽다고 해서 이것이 영원할 것처럼 절망할 필요도, 지금 만족스럽다고 해서 이 역시 영원할 것처럼 자만해서도 안된다는 거지. 어차피 언젠가는 안과 밖이 바뀌고 위와 아래가 뒤집히는 전환과 순환의 시기가 올 테니까.

 

 

물론 그게 언제 어떻게 올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서 평소에 늘 대비하라고 어른들이 그렇게 얘기하는 건지도 몰라. 대비한다고 늘 막을 수는 없지만 대비하지 않는 것보다는 분명 나을 테니까.

 

이렇게 얘기하고 보니 이제 나도 이 사회의 어엿한 꼰대가 된 것 같아.

우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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