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存在感)_1

2018.03.26 15:48 471

존재감(存在感)_1

 

[명사]존재하므로 느끼는 감각. 나에 의한 존재감과 남에 의한 존재감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방식에 따라서는 빛의 존재감과 어둠의 존재감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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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외로움을 타자와 나 사이의 존재감 불균형에 의한 감정이라 정의했어.

 

 

그렇다면 존재감의 충만 여부가 외로움과 가장 밀접한 관계라 말할 수 있겠지. 물이 부족하면 갈증을 느끼듯, 존재감이 부족하면 외로움을 느낀다는 얘기야.

 

 

어쩌면 자전거 페달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아. 한쪽 페달이 올라가면 반대편 페달은 내려가듯, 존재감이 충만하면 외로움은 덜해지고 반대로 외로움이 가득할 때는 존재감이 부족할 때라는 거지.

 

 

여기서 중요한 건 페달이 서로 오르내리며 자전거가 구르듯, 삶 또한 존재감과 외로움이 서로 교차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외로움이 싫다고 존재감이 충만한 상태이기만을 바란다면 마치 자전거 페달이 멈춘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거지. 물론 그동안의 추진력으로 한동안은 페달을 고정한 채 굴러갈 수도 있고, 운이 좋아 가끔씩 내리막길을 만날 수는 있는 거지만 말이야.  

 

 

고로 외로움과 존재감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므로 애써 존재감만 추구하거나 애써 외로움을 피하려 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어차피 둘 다 삶에 연결된 페달들, 즉 한 몸인 거니까.

 

 

시지프의 신화를 연상해보면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어. 뾰족한 정상에 둥근 돌을 올리라는 신의 형벌을 받았지만 결국 평생 바위와 함께 산을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었던 시지프의 삶 말이야.

 

 

바위를 밀어 산 정상까지 힘들게 올라봐야 임무를 완수할 수는 없었지. 칼끝처럼 뾰족한 산에 거대한 바위를 멈추게 할 수는 없는 거니까. 평생 불가능한 임무였어. 게다가 아이러니기도 했지. 돌을 밀고 올라가는 동안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고통을 감수했고, 돌이 굴러 떨어지는 동안은 깊은 절망과 함께 휴식이 주어졌으니까.

 

 

그래서 시지프 신화를 두고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고 하는 것 같아. 외로움과 존재감이 반복,  교차되며 흐르는 인간의 삶 말이야.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시지프 신화> p.181~182/알베르 까뮈/김화영/민음사

 


 

아무튼.

 

국어사전은 존재감을 이렇게 정의해.

 

존재감(存在感)

[명사]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느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야. 다만 나를 제외한 주변 대상의 존재감만 국한해 얘기하는 것 같아서 좀 애매해 보여. 그러니까 1인칭 시점으로만 존재감을 정의한 느낌이라는 거지. 존재하는 건 눈에 보이거나 잡히는 ‘대상’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관찰하거나 느끼는 ‘나’도 존재하거든. 게다가 대상의 존재감과 나의 존재감은 서로의 관계에 따라 연쇄적 화학반응을 일으켜.

 

 

예를 들면 이런 거야.

 

 

나에겐 아들이 있어. 아빠의 입장에서 나의 아들에게는 존재의 다양한 특징이 있지. 생명, 사람, 한국인, 내 새끼, 남자, 초등학생, 키 150cm, 충치 두 개, 왼쪽 무릎에 콩알 만한 점 등.

 

 

하지만 아빠가 아닌 다른 사람의 관점일 경우 내 아들의 존재감은 굉장히 단순해지거나 모호해질 거야. 미쳐 날뛰는 초딩 정도? 당연하지. 아빠만큼 아는 게 적거나 관심이 적을 테니까(물론 아빠라도 관심이 없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모를 수 있지만).

 

 

게다가 위에 열거한 특징은 현재 내 아들의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존재감 파편들에 불과해. 특별한 관계가 아니어도 마음만 먹으면 감각 기관으로 누구나 파악 가능한 특징인 셈이지.

 

 

하지만 퇴근 후 집에 오면 두 팔 벌려 안아줘 아빠를 기쁘게 했던, 밥 먹으라 다그치자 냅다 숟가락을 던져 아빠를 화나게 했던, 자다 깨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며 울먹여 아빠를 걱정하게 했던 아이의 존재감을 다른 사람도 똑같이 느낄 가능성은 없을 거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짐작할 수 있는 게 전부지.

 

 

또한 퇴근 후 집에 오면 두 팔 벌려 안아줘 아빠가 기뻐하자 뽀뽀까지 해줬던 아들, 밥 먹으라 다그치니 냅다 숟가락을 던져 아빠가 화를 내자 울음을 터뜨렸던 아들, 자다 깨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며 울먹여 아빠가 걱정하자 잠시 후 안정을 찾고 다시 잠들었던 아들의 존재감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존재감은 서로 반응해.    

 

 

그래서 존재감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특정 대상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거야. 대상이 발휘하는 존재감을 느끼는 이가 또 대상에게는 어떤 존재감을 주냐에 따라 서로의 존재감이 시시각각 변할 수밖에 없는 거지. 앞서 비유했던 마주 선 거울이 서로의 상을 무한 반사하는 것처럼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으면 존재감은 상호 작용반작용의 무한궤도를 타게 된다는 얘기야.

 

 

어쩌면 너무 당연한 얘기를 너무 장황하게 설명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하지만 이 역시 독자의 생각에 따라 내 얘기가 당연한 건지 장황한 건지 그 존재감이 달라질 것 같아.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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