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2018.03.20 15:36 485

외로움

 

[명사] 존재감 불균형, 혹은 존재감 불능에서 비롯되는 지랄같은 마음.

혼자라서 외로울 수도 있지만, 오히려 함께 있을 때 더욱 외로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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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우니까 남들보다 돈이라도 벌어 있는 척을 하고 싶고,

외로우니까 남들보다 외모라도 꾸며 잘난 척을 하고 싶고,

외로우니까 남들보다 학벌이라도 만들어 아는 척을 하고 싶고,

외로우니까 남들보다 권력이라도 쥐어 쎈 척을 하고 싶어하지.

 

 

결국 모든 건 외로움 때문인 것 같아.

 

 

왜냐하면 돈이든 외모든 학벌이든 권력이든,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아무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지. 그렇잖아. 무인도에서 내가 재벌이면 뭐해. 날 부러워해줄 사람도 없고 날 위해 일해줄 사람도 없는데.

 

 

외모나 학벌, 권력도 마찬가지야. 일류대학을 졸업한 현직 국회의원인 정우성이라고 해서 무인도의 삶이 딱히 더 행복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산다는 게 나 자신을 위해 아둥바둥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타인들과 함께 있는 나’를 위해 살고있다고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일 거야. 그래서 나도 중요하지만 남도 중요한 거지. 그리고 나와 남 사이의 어떤 균형이 깨지면 외로워지는 거고.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외로움이란 건, 흔히 연상되는 성인남녀의 ‘옆구리 허전함’에 국한된 얘기는 아니라는 걸 미리 알아줬으면 해.

 

 

외로움이란 과연 뭘까?

 

사전을 뒤져보면 외로움은 ‘홀로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되어 있어.

 

 

딱히 틀린 말이라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홀로 되어’라는 말의 의미가 좀 애매한 것 같아. 물리적으로 홀로일 때와 심정적으로 홀로일 때가 다르니까 말이야. 즉, 혼자 있다고 꼭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같이 있다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라는 얘기지.

 

 

그렇잖아. 외로움은 시도 때도 없고, 꼭 혼자 있을 때만 발병하는 것도 아니잖아. 타인들 틈바구니에서 더 외로워지는 경우도 많아. 심지어는 가족이나 애인과 함께 있을 때 차라리 혼자 있고 싶은 경우도 적지 않고 말이야. 혼자 공부든 게임이든 야동이든 몽상이든을 하고 있을 때 편해지는 경우도 많다는 얘기지.

 

 

물론 홀로일 때, 특히 홀로인 상황이 장기간 지속될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욱 외로워질 가능성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외로움은 ‘홀로’의 여부와 절대적인 상관관계에 있지는 않은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외로움을 이렇게 정의하고 싶어.

 

 

‘타자(他者)와 나 사이의 존재감 불균형에서 느껴지는 지랄같은 마음’

 

 

이렇게 정의한다면 외로움이 꼭 ‘홀로’의 상태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걸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잖아. 존재감의 불균형이란 건 꼭 홀로일 때 발현되는 게 아니라 나와 맞지 않는, 혹은 내가 소외되는 집단 속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거니까 말이야.

 

 

예를 들어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고 해도 그곳이 자유한국당 전당대회 장소라면 난 정말 외로울 거 같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곳이 군대 내무반이라면 난 차라리 자살을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어.

 

남태평양의 누드비치에서 아무리 많은 헐벗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발기부전이라면 난 아마 이렇게 절규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여러분,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즉, 나의 존재감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오히려 적개심을 품을 수도 있는 타인과 함께 할 때(자유한국당 전당대회), 그리고 네들은 나의 존재를 원할지 몰라도 나는 네들의 그런 기대에 결코 부응하고 싶지 않을 때(군대 내무반), 그밖에 나도 간절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고 상대방도 그러길 바라지만 능력 때문이든 상황 때문이든 그 접점이 어긋날 때(누드비치), 사람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얘기야. 소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도 하지. 물론 나 역시 누군가를 외롭게 하는 군중이 될 때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면 물리적으로 홀로일 때, 그야말로 혼자일 때 느끼는 외로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역시 존재감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만 이때는 타인과 나 사이의 ‘존재감 불균형’에서 비롯된 외로움이 아니라, 타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감 불균형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존재감 불능’에서 비롯되는 외로움이라 할 수 있어.

 

 

존재감의 불균형이란 건 결국 존재감의 득실을 셈할 수 있는 타자가 있기때문에 발생하는 거거든. 반면에 ‘존재감 불능’이란 나의 존재에 영향을 받을 대상이 없거나, 혹은 반대로 나의 존재에 영향을 줄 상대가 아예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원초적 외로움인 거고.

 

 

만약 물리적 홀로의 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에는 심리적 홀로의 상황과는 차원이 다른 외로움이 발생할 수 있을 것 같아. 타인과 함께할 때는 존재감을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얻으려 애쓸 수도 포기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물리적 홀로는 그런 가능성 자체가 없을 테니 말이야.

 

 

물론 그런 극단적 홀로의 상황은 현대인에게 흔치 않아. 무인도에 갇힌 <로빈슨 크루소> 나 인류멸망 이후 홀로 살아남은 얘기인 <나는 전설이다> 같은 영화 주인공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니까.

 

 


 

 

물리적 외로움의 극단적 사례를 보여주는 영화. <나는 전설이다>, <캐스트어웨이>

 

 

 

아마도 현실적으로 예상할 수 있는 물리적 홀로의 경우는 대략 다음과 같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을 거야.

 

 

몇 년을 사귄 애인과 갑자기 헤어졌다거나, 어느 날 사고로 가족을 잃어 홀로 남겨졌다거나 하는 경우 말이야. 이건 앞서 예를 들었던 타인들 사이에서의 존재감 결핍과는 비교조차 힘들 것 같아. 그야말로 거대한 외로움과 슬픔이겠지.  

 

 

하지만 이때의 거대한 외로움과 슬픔도 단지 혼자가 되었다는 물리적 상태에서 비롯된 거라 설명하기엔 좀 부족해.

 

 

남들은 별 관심 없을지 몰라도,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받으며 함께 웃고 울고하던 사람들(애인, 가족)의 갑작스런 부재에서 기인하는 상실감과, 어쩌면 그 부재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주는 외로움과 슬픔인 거지.

 

 

다시 말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그럴듯하게 살고있다는 걸 가장 강력하게 느끼게 해주던 다른 존재를 상실했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인 거지 단순히 혼자가 되어서 외로움을 느끼는 건 아니라는 말이야.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의 존재감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던 배구공 ‘윌슨’

 

 

 

게다가 애인, 혹은 가족과의 갑작스런 헤어짐이 극단적인 외로움을 유발할 것처럼 여기는 데에는 한 가지 전제가 관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만약 헤어지기 전 애인이 노상 바람이나 펴대고 진상이나 부리던 애인이라 쳐봐. 그 헤어짐은 고통 끝 행복 시작을 알리는 축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사고로 잃은 가족이 평소 끔찍한 폭력을 일삼던 악성 가정폭력범이라 쳐봐. 외롭기는커녕 갑작스런 보험금에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를 거야.

 

 

즉, 나의 존재감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가족, 친구, 애인 등의 상대를 통해 얻고자 하는 존재감이란 대체로 사랑(신뢰, 우정, 애정 등)이 전제된 ‘빛의 존재감’이란 거지. 바꿔 말하면 사랑이 전제된 가족, 친구, 애인이 아니라면 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나의 존재감은 없거나, 아니면 성격이 완전히 다른 ‘어둠의 존재감’일 거라는 얘기야.

 

 

여기서 잠깐.

이건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내가 자주 언급하게 될 ‘사랑’ 대해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깐 내가 말하는 사랑이 성인 남녀 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그런 사랑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물론 그것도 굉장한 사랑이긴 해. 정말 중요하지.

 

 

하지만 내가 외로움과 관련한 사랑을 얘기할 때, 자꾸 그쪽으로만 연상하는 건 좀 곤란해. 내가 살면서 거의 처음으로 상방 15도 각도를 유지한 채 먼 산을 바라보며 어딘가 슬픈 목소리로 사랑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는데 독자들이 자꾸 헐벗은 장면만 연상하면서 마치 주인의 슬리퍼와 싸우는 개처럼 지 혼자 헐떡거리는 반응을 보인다면 난 정말 더욱 외로워질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이제부터 언급하는 ‘사랑’은 그냥 막 우아하고, 조금은 아프고, 옷도 다 챙겨 입은 그런 사랑이라고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아무튼.

 

 

지금까지 한 얘기를 다시 정리해볼게.

 

 

나는 외로움을 ‘타자(他者)와 나 사이의 존재감 불균형에서 느껴지는 지랄같은 마음’이라고 정의하고 싶어. 그리고 존재감 불균형의 극단적 상황을 존재감 불능이라 따로 부르고 싶고.

 

 

존재감 불능은 그야말로 혼자가 되었을 때, 다른 존재를 통해 내 존재감을 반사 받을 수 없는 경우를 의미해. 마치 거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확인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라는 거야.

 

반면에 존재감 불균형은 다른 존재와 함께 있기 때문에 발생해. 마치 거울은 있지만 그 거울이 볼록 거울이거나 오목 거울이어서 상을 왜곡한다거나, 깨진 거울이어서 나의 모습을 흉측하게 보여주는 것과 같아.

 

 

물론 거울에 문제가 있을 때만 존재감 불균형이 생기는 건 아니야. 때로는 너무 맑아 나의 모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혹은 너무 커서 나만 비추는 게 아니라 나 이외의 많은 것들까지 동시에 품기 때문에 그 거울에서 도망가거나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어. 이런 경우는 나를 비추는 상대는 멀쩡하지만 그 앞에 선 내가 멀쩡하지 않은 경우겠지.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건 나 이외의 다른 존재만 거울이 되는 건 아니라는 점이야. 다른 존재에겐 바로 내가 거울이 돼. 존재감의 거울말이야.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변화무쌍한 건지도 모르겠어. 거울과 거울이 서로 마주보면 무한의 상이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야.

 

 

참고로 파울로 코엘료의 책 <연금술사> 서문을 소개할게. 비슷한 취지의 내용이 담겨있거든.

 

 


 

연금술사는 대상들 중 한 명이 가져다준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 표지가 떨어져나갔지만, 저자 이름은 알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였다. 책 이곳 저곳을 훑어보던 그는 나르키소스에 관한 이야기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연금술사는 나르키소스의 전설을 알고 있었다. 물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매일 호숫가를 찾았다는 나르키소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결국 호수에 빠져 죽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났고,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서 수선화(나르키소스)라고 불렀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의 이야기는 결말이 달랐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숲의 요정 오레이아스들이 호숫가에 왔고, 그들은 호수가 쓰디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대는 왜 울고 있나요?" 오레이아스들이 물었다.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어요." 호수가 대답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우리는 나르키소스의 아름다움에 반해 숲에서 그를 쫓아다녔지만, 사실 그대야말로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 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숲의 요정들이 말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호수가 물었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물결 위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잖아요!"

 

놀란 요정들이 반문했다. 호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몰랐어요. 저는 그가 제 물결위로 얼굴을 구부릴 때마다 그의 눈 속 깊은 곳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영상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 없잖아요."

 

"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 연금술사는 감탄을 터뜨렸다.

 

(<연금술사> 서문. 파울로 코엘료/문학동네/최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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